• 바르사는 어떻게 누구나 인정할 만한,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스 아카데미와 축구팀을 창조해 냈을까? 그리고 왜 시들해졌을까? 크루이프의 축구 철학이 스며든 최근 버전은 왜 바르셀로나가 아닌 맨체스터와 뮌헨에서 구현되고 있는 걸까?
  • 평범한 사람들과 천재들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이 바로 지금의 바르사를 만든 힘이다.
  • 카탈루냐 사회의 정점은 어쩌면 FC 바르셀로나의 이사회일지도 모른다. 강조했다시피 바르사는 노동자 계층에 기반을 둔 클럽이 아니다. 스위스 출신의 이민자인 회계사 한스 감퍼(Hans Gamper)가 지역 스포츠 신문에 63개 단어로 된 광고를 내고, 신문사에서 축구 경기 일정 조율하는 일을 맡고 싶은 사람을 모집했던 1899년 이후 쭉 상인 계급 사람들이 운영해 왔다.
  • 파시스트들은 바르사를 꾸준히 주시했다. 1940년에는 팀명에 붙은 영어식 표기 ‘FC(Football Club)’를 스페인어 ‘CF(Club de Futbol)’로 바꾸도록 강요했다.11 처음엔 정권에서 클럽 회장을 정해 주기도 했다.
  • 레알 마드리드가 플로렌티노 페레스(Florentino Pérez) 회장 체제에서 독재를 닮아 가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기업처럼 운영되며, 맨체스터 시티가 가족 비즈니스처럼 움직여지는 것과 달리, 바르사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과두(寡頭) 집단 체제로 운영된다.
  • 바르사 내부에서 가장 큰 카스트는 15만 명에 달하는 소시들(socis)이다. 소시의 절반은 시즌 티켓 보유자들이다. (…) 1970년대 말, 바르사 수입의 60퍼센트 이상이 시즌 티켓에서 나왔다. 2020년, 이 비중은 전체의 5퍼센트 이하로 떨어졌다. 하지만 소시들은 개의치 않는다. 여전히 자신들이 클럽의 ‘소유자’라고 생각한다.
  • 남미, 북미, 파키스탄에서 카탈루냐로 이민을 온 사람들이 바르셀로나에서 수십 년을 거주해도 소시가 되는 일이 거의 없다. 거주자의 26퍼센트가 해외에서 온 사람들인 이 새로운 글로벌 도시에서 바르사는 여전히 동네 사람들의 것으로 남아 있다.
  • 소시가 되는 일은 가족에게도 중요한 문제다. 로셀은 15만 명의 소시들이 회장을 선출한다는 생각은 오해라고 말한다. “2만 가구가 투표하는 겁니다.”
  •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소시들도 있다. 그들은 그저 (축구가 아닌) 바르사를 사랑할 뿐이다. 수천 명의 소시들이 시즌 티켓을 갖고도 경기장에 거의 오지 않는다.24 오로지 엘 클라시코가 열릴 때만 모든 소시들이 경기장에 몰려든다.
  • 카탈루냐에만 550개나 있는 바르사 팬클럽들(penyes)은 지역 사람들에게 큰 의미를 갖는 사교 활동의 중심이다.
  • 바르사는 축구 클럽이라기보다는 공동체 문화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로 축구계가 셧다운이 될 무렵, 바르사는 500명가량의 풀타임 직원과 그 수만큼의 비정규직 노동자들(매치데이 관리인, 보안 담당자 등)을 고용하고 있었다. 바르사는 회장 독재로 운영되는 레알 마드리드보다 3분 1 정도 더 많은 직원들을 고용하는 바람에 필요보다 많은 직원들을 두었다. 이러한 현상은 사람을 자르기보다는 새로 뽑는 데 더 관대한 문화에서 비롯됐다.
  • 바르사 임원들은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학교와 학교 출신인데, 그곳에서 학창 시절부터 알고 지내는 동창들 중에는 심리학자나 데이터 분석가, 브랜드 매니저가 된 친구들이 있다. 임원들은 이들을 바르사 운영진으로 고용한다.
  • 자신을 소시라고 밝힌 바르셀로나 지역 광고인 한 명은 바르사 임원진 사이에서 통용되는 ‘숙련도’의 기준이 애매하다고 꼬집으면서, 자신의 직업적 평판에 흠집이 날까봐 바르사 구단에 입사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러고는 바르사 취업은 경력 측면에서 볼 때 “내려가기만 하는 경력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것”이라고 내게 말했다.
  • 어느 직원은 재직 당시의 바르사를 이렇게 회고했다. “전혀 회사처럼 느껴지지 않았어요. 지역 의회에서 일하는 공무원에 더 가까웠죠.” 그의 말에 따르면, 스태프들은 오전 10시쯤 회사에 나타나 커피를 마시고,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주고받은 뒤 11시쯤부터 일하기 시작했다. 급여는 상대적으로 낮았지만, 바르사에서 일하는 덕분에 지역 사회에서는 꽤나 인정받을 수 있어서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어 그는 클럽 내에서 내려지는 모든 결정들은 “클럽을 운영하려면 돈을 얼마나 벌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소시들 사이에서 회장의 평판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고 말했다.
  • 감페르는 다양한 종목의 코치와 선수 들이 교류하는 장소다. 바르사는 오랫동안 농구, 핸드볼, 풋살을 비롯한 비축구 종목들을 운영해 왔다. (…) 바르사가 이렇게 다양한 스포츠와의 교류를 통해 굉장한 이득을 보는 것 같다. 자신의 오른팔로 수구 선수 출신을 중용했던 크루이프와 과르디올라는 바르사에 있는 다른 스포츠 팀에서 늘 아이디어를 얻었다. 크루이프는 당대 최강 핸드볼팀의 감독인 발레로 리베라(Valero Rivera)와 종종 아이스 링크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어릴 적 축구 선수였던 과르디올라는 핸드볼팀에서 훈련한 적도 있다. 나는 FC 바르셀로나가 축구 클럽이 아니라 ‘멀티스포츠’ 클럽이라고 여기게 됐다.
  • 나는 일반적인 회사가 거대한 축구 클럽에서 배울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둘 사이에는 절대로 메울 수 없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축구 선수의 역할이 절대적이라는 점이다.
  • 압박, 아약스식으로 말하면 ‘사냥’을 위해서는 거의 군대 수준의 조직화가 필요하다. 각각의 선수들은 제대로 된 위치를 정확하게 점유해야 한다. 그리고 압박을 할 때는 모두가 함께해야 한다.
  • 1987년부터 1990년까지 ‘위대한 밀란’이라 불리던 팀의 감독이었던 아리고 사키(Arrigo Sacchi)는 이렇게 말했다. “축구에서 진짜 전술적 혁명이 일어난 적은 단 한 번뿐입니다. 혁명은 축구가 개인의 경기에서 집단이 하는 경기로 바뀌는 시기에 일어났습니다. 바로 아약스에서 말이죠.”
  • 아약스 특유의 무한 스위칭은 경기장 곳곳을 누비고 다니던 크루이프 스타일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크루이프는 우리가 요즘 ‘가짜 9번(false 9)’이라 부르는 포지션의 극단적인 사례였다. 즉, 자신의 원래 위치를 끊임없이 벗어나 미드필더나 윙, 심지어 중앙 수비 위치까지 내려가 마크맨들이 공간과 기회를 찾기 어렵게 만드는 센터 포워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