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아는 귀머거리 농, 벙어리 아, 그저 두 가지 장애를 결합해놓은 표현이라 장애만을 지칭할 뿐 장애인의 정체성을 나타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비할 바는 아니지만 쉬운 예를 든다면 안경 쓴 사람을 “야, 안경!”이라고 부른다거나 얼굴에 여드름이 많은 사람을 “야, 여드름!”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결이다. 그러니 정확하게 쓰려면 ‘농아인’이라고 써야 하며 실제로 농아인들은 ‘농아’라는 표현을 굉장히 불쾌해 한다고 했다. 장애를 자신의 정체성이자 개성이자 삶으로 인식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농아인들도 있는데, 그저 장애만을 설명하는 농아라고 칭해버리면 비하의 의미로 받아들인다는 거다. 정말이지 상상도 못한 내용이다.
- 잘하고 싶어서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저것(”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잘해야지.”)보다 의욕을 꺾는 말이 없다. 구체적으로 대놓고 결과만이 중요하다고 다그치든지, 유의미한 노력의 요령을 가르치든지, 둘 중 하나를 못 하고 저런 말을 하는 건 ‘통찰력 있(어 보이)는 멋진 멘토(같은 나)’ 식의 자아도취 아닐까. 모든 노력이 보상 받는 건 아니지만 열심히 안 하고서는 잘할 수가 없다는 걸 알면서, 왜 자꾸 있어 보이는 척인가.
- 일반인들도 찾아내는데 프로들이 찾으면 얼마나 징그럽게 찾아대겠어. 그런데 우린 그게 스트레스인 거다. 프로 번역가가 잘해주셨겠거니 하고 믿고 보고 싶은 거지. 프로 셰프가 남의 식당 가서 이건 굽는 온도가 틀렸네, 간이 살짝 덜 됐네, 기름을 잘못 썼네 따위의 것들을 따지지 않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차려나온 음식을 맛있게 먹고 싶은 것처럼.
- 그런 무용담이 곱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엉뚱한 환상을 심어준다는 데 있다. 그 직업을 하기 위해선, 정확히 말하면 그 직업에서 성취를 이루기 위해선 영웅적이고 운명적인 서사가 필연적이라는 인상을 남긴다는 거다. 성공한 사람의 부풀려진 사연이 미디어에서 한번 더 가공되어 환상을 심고 그걸 본 사람들의 기를 죽인다. 너무 꼰대 같고 재미없는 소리지만 일정한 성취에 기본이 되는 건 따분하고 지루하고 고된 반복을 묵묵히 견디는 무던함, 그리고 제 살길을 어떻게든 찾아내 지속할 줄 아는 현실감이다. 대개는 그런 것들이 쌓여 성취가 된다. ‘대개는’.
- 대부분은 특별한 의식이나 운명적, 영웅적 서사 따위 없이 그저 철저히 직업인으로 업을 유지하다보니 그 자리에 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나와 같은 민망함 혹은 죄스러움, 찜찜함을 느끼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우린 우리 자리에서 꾸준히 일해온 것뿐인데 그런 불편함을 느낄 필요가 있나 싶었다.
- 미디어에 노출된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사연에(정말로 특별한지는 모르겠지만) 부러움이나 자괴감 느낄 것 없이 내 자리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으면 될 일이다. “어쩌다보니 이 일을 하게 됐어요”라는 말은 어찌 보면 그 어떤 사연보다도 훨씬 운명적이다.
- 번역가를 문화적, 언어적 필터라고 했을 때 그 필터를 거친 결과물엔 번역가의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아무리 정제하려 해도 불순물이 남는다. 그 불순물이 유익한 것이냐, 유해한 것이냐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불순물이 없다면 그건 원재료 그대로란 의미다. 하지만 번역가라는 필터는 인성을 띄고 있어서 그 필터가 평생 겪어온 경험은 물론이고, 가치관과 언어 습관 등이 결과물에 반영된다.
- 아내와 나에게 그런 우려의 말(”24시간 붙어 있을 건데 괜찮겠어?”)을 건넨 사람들은 대부분 프리랜서가 아니었고, 배우자와 11년씩 24시간 붙어 살아본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가장 중요하게는 ‘우리’가 아니었다. 살아온 방식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개성도 다르고, 환경도 다른데 그들은 대개 악담인지 조언인지 알 수 없는 상투적인 말들을 한다.
”네가 뭘 몰라서 그러지. 막상 결혼해봐라.”
결혼을 해도 그들의 우려는 현실이 되지 않았다. 그랬더니 적어도 5년은 살아봐야 안단다. 11년이 지나도 그들의 우려는 현실이 되지 않았다. 아마 다시 물어보면 15년은 살아보라고 할 거다.
”네가 뭘 몰라서 그러지. 애 낳아봐라.”
애를 낳아 4년 넘게 키웠지만 그들의 우려는 현실이 되지 않았다. 아마 다시 물어보면 “둘은 낳아봐야 알지”라고 할 거다. 이렇게 겪고 보면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 오지랖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긴 오지랖이 대부분 그렇긴 하지. 오지랖은 자신의 알량한 경험이 세상 전부인 것처럼 여기는 사람이 보내는 어긋난 호의다. 그래, 일단은 호의라고 믿자.
- 영화 번역가로서 가장 기분좋은 순간은 “내가 번역한 영화를 관객들이 저렇게나 좋아해줄 때”가 아니라 “관객들이 저렇게나 좋아해주는 영화를 내가 번역했을 때”다. 얼핏 같은 말 같지만 그렇지 않다. 관객들이 저렇게나 좋아해주는 영화를 내 품에 안을 수 있었던 행운. 내 손으로 고이 보듬어 내놓을 수 있었던 행운. 그 모든 건 행운이다.
- 직업인으로서의 삶에서 금전적 보상 이외의 보상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다면, 직업에 대한 애착이 한결 강해지고 당면한 작업을 대하는 성의도 커지기 마련이다.
- 전통적인 틀에서 벗어날 기회를 고를 땐 시도가 실험적인 만큼 신중해야 한다.
- 살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당신과의 마지막날이 있다. 다만 그게 언제일지는 모른다. 그래서라도 소중한 사람에겐 물론이고 아무리 싫은 사람이라도 마지막 인사는 무던히 하는 게 좋다. 억지로 상냥하게 대할 필요는 없지만 일부러 상처를 줄 필요도 없다. 그저 덤덤하게 후회가 남지 않을 만큼은 인사하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 지구에 사는 사람은 죄다 어딘가는 한심스러운 존재다. 당장 중요한 것엔 시선을 두지 않고 애먼 것들에 정신이 팔려 치고받는다. 당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때때로 상기시켜주는 것, 그게 모든 죽음들이 남기는 유산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