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라이즌 제로 던>의 ‘포커스’는 내가 해본 게임 중 가장 멋지게 HUD(Head Up Display)를 세계관에 통합한 경우였다. 많은 1인칭 게임(주로 FPS)에서는 플레이어들에게 적의 위치, 약점, 이동 경로 등 전투에 필요한 정보 혹은 퀘스트를 풀어나가는 데에 필요한 환경 정보를 제공하는데, 보통 이 정보들은 유리창에 정보를 표시해주는 미래적인 장치처럼 그냥 플레이어의 화면에 띄워진다. 왜 그게 가능한지 굳이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호라이즌 제로 던>의 에일로이는 과거 인류의 첨단기술 유적을 탐험하다가 포커스를 획득하고, 그 포커스를 통해서 비로소 환경과 적에 대한 심층 정보를 획득한다. 이렇게 세계관과 잘 들어맞는 도구를 경유해 게임 시스템을 보여주면, 게임에 더욱 몰입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비현실적 게임 메커니즘을 내적 정합성을 충족하며 그럴싸하게 게임 속의 세계관에 합치는 설정들을 좋아하는데, 사실 이건 SF랑 비슷한 면이 있다. SF는 비현실적인 요소들을 아무렇지 않은 척 세계의 일부로 끌어들이면서도, 이걸 자꾸 ‘말이 되게끔’ 설명하려는 욕망을 좀처럼 놓지 못한다.
  • 내가 좋아하는 SF 작품에는 가끔 “쓸데없는 정보가 많다”, “세계나 설정을 자꾸 설명하려고 한다” 같은 리뷰가 붙는데, 나는 그런 말을 보면 내가 그 작품을 만든 것도 아닌데 속으로 괜히 억울해한다. 아니, 그 설명 많은 부분이 좋다고요…
  • 중요한 건 게임 속 이야기가 플레이어에게 강제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선택 가능한 옵션이다. (…) 이런 것들을 하지 않아도 게임은 진행할 수 있다. (…) 나는 게임의 이런 스토리텔링 방식이 현실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닮아 있어서 재미있다고 느낀다. 삶에는 많은 이야기 조각들이 있다. 원한다면 이것을 서사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굳이 그러지 않는다. 삶이 이야기가 되는 것은 조각들을 끼워 맞추려고 애쓸 때나 가능한 일이다. (…) 우리는 그냥 살아간다. 도처에 있는 정보와 사건과 이야기를 스쳐 지나간다.
  • 플레이어는 게임 스토리를 이해하지 못해도 그 삶(세계)를 살아볼 수 있다. 일단 경험한 이후에 그 경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 언젠가 나는 그냥 스쳐 지나간 골목으로 되돌아가 그곳의 이야기 조각을 다시 살펴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나의 선택과 무관하게 그곳에 이야기 조각이 존재한다는 것, 그 사실이 나이트 시티를 정말 실재하는 세계처럼 만든다.
  • 종종 “넷플릭스 시대에 소설은 어떤 강점이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 나는 소설이 ‘큰돈이 안 된다’는 것 자체가 강점일 수 있다는 말을 반쯤은 진담으로 한다. 시작부터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고, 그래서 어느 정도는 보수적으로 안전하게, 대중 취향에 맞추어 갈 수밖에 없는 매체들과 달리 소설은 소설가 한 명이 먹고살 수 있으면 어떻게든 작품이 나오게 되어 있다. 그렇기에 소설은 눈치를 덜 본다.
  • 그때 나의 결정이 내 삶을 바꿀 만큼 유의미했을 것이라는 생각과, 고작 그 정도 결정에는 큰 의미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 사이에서 흔들린다. 모든 것이 정해진 결정론적 세계가 나을까, 아니면 나의 선택에 의해 마구 요동치는 세계가 나을까? 둘 다 묘하게 매력적인 구석이 있지만, 아마도 후자가 좀 더 인기 있을 것 같다. 게임에서 이 ‘선택과 결과’가 늘 중요한 테마로 다뤄지는 걸 보면 말이다.
  • 만약 ‘선택과 결과’를 정밀하게 구현한 게임이 있다고 해도,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택일까? 어쩌면 다양한 루트가 존재하는 게임이라고 해도 플레이어들은 이미 짜인 ‘멀티 엔딩’의 판 위에서 놀아나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제작자들이 짜놓은 루트이기 때문이다. (…) 이런 근본적인 제약 때문에, 비디오게임은 마치 ‘선택과 결과’가 존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유로운 행동이 불가능한 결정론적 세계와도 같다는 분석도 있다. (…) 그런데 이쯤에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의 선택이 단지 ‘선택할 수 있다는 환상’에 불과하다면, 그건 게임 밖 현실의 선택과 얼마나 다를까. 현실의 선택은 정말 게임보다 훨씬 자유로울까? (…) 아니, 그럴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현실의 선택은 게임보다도 더 자유롭지 않다. 나를 둘러싼 환경과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 일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과거와 미래의 맥락이 나를 제약한다. 나는 현실의 개연성 속에서 움직인다. (…) 게다가 나의 자유의지는 지극히 개인적 범위에 한정되어 있다. 거대한 불평등과 전쟁과 기후위기 앞에서 나는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지만, 그 선택은 너무 작고 무력하며, 세계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현실의 나에게 게임보다 더 큰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야말로 환상인지도 모른다.
  • 그런데 <디스코 엘리시움>의 이런 시스템은 언뜻 ‘선택과 결과’라는 테마를 무척 개성 있게 잘 구현한 것 같지만, 한편 전형적인 ‘눈속임’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 해리에게 엄청나게 많은 선택지가 주어지고 그 선택들이 중요해 보이지만,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실제 외부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게임은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계속해서 변하고 영향을 받는 해리의 내면세계와 목소리들을 잘 보여주면서도, 정작 해리 외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대부분 고정되어 있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 다른 사람들의 후기를 살펴보다가 문득 신기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 사람이 플레이한 해리는 내가 플레이한 것과 되게 다르네’ 다른 목소리, 다른 인격, 다른 생각으로 구성된 해리는 같은 사건을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다른 내적 독백을 내놓는다. 첫 플레이와 다른 정치적 사상, 이념을 가진 해리로 플레이하기로 결심한다면 분명 같은 흐름인데도 경험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야기는 어차피 고정되어 있고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라고 해도 내가 그것을 겪는 방식이 달라진다면 그것은 같은 이야기인가? 선택할 수 있다는 환상은 정말로 환상인가? <디스코 엘리시움>은 나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다. 시작과 결말이 정해져 있어도, 선택이 외부 세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더라도, 경험하는 내가 그것을 느끼고 사고하는 방식이 달라질 때, 이야기는 다시 쓰인다. 그것은 모두 다른 이야기가 된다.
  • 라프 코스터는 <라프 코스터의 재미이론>이라는 게임 디자인 고전에서, 게임은 패턴을 학습하게 하는 것이고 그 학습 과정이 몰입을 이끌어내기 때문에 게임에 몰입하는 게이머일수록 이 패턴을 둘러싼 허구를 무시하게 된다고 말한다.
  • 게임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추상성의 층위에서 폭력과 전쟁에 매료되며, 아마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럴 것이다. 하지만 게임이 더는 ‘단지 게임일 뿐’이라는 방어 논리로 게임만의 세계로 숨어들 수 없을 때, 게임이 그것의 재미와 매력과 규모로 사회에 발휘하는 막대한 영향력만큼이나 매체로서의 책임을 질문받을 때, 나는 그 앞에서 표백도 외면도 아닌 또 다른 길, 더 나은 길이 있다고 믿는다. 이 무결하지 않은 게임이라는 세계와 이 세계가 내포하는 모순을, 똑바로 바라보고 질문하고 탐구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 한국의 게이머 커뮤니티는 게임을 사회와 연결하는 일에 배타적이며, 특히 다양성에 대한 논의가 억압되고 있다. 게임 관련 매체는 게임에 대한 장문의 리뷰를 자주 수록하지만 이것이 게임 내적인 비평을 넘어, 게임 외적인 비평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은 듯하다. 게임 강국으로 불리는 한국의 이면에는 상업성에만 치우치기 쉬운 비즈니스 모델, 포용적이지 않은 커뮤니티 문화, 지나친 경쟁주의와 같은 그림자가 있으며, 나는 게임과 게임 바깥 사회의 단절이 이런 문제를 더욱 부추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 게임이 가진 재미와 폭의 깊이는, ‘재미있으면 그만’이라는 태도보다는 그 재미에 대한 다각도의 탐구를 통해 더욱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게임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 더 많은 관점이 이 흥미로운 매체를 어디까지 데려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