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해에 겨우 3000명 정도가 옥스퍼드에 입학한다. 영국에서 또래 집단의 0.5퍼센트도 안 되는 수치이지만3 옥스퍼드가 영국을 장악했다. 꽤 오랫동안 그랬다. 1940년부터 현재 리시 수낵까지 17명의 총리 가운데 13명이 옥스퍼드 출신이다
- 옥스퍼드 출신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뒀다. 정치를 한순간도 생각해보지 않은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정치에 뜻을 둔 이들 가운데 해럴드 윌슨, 마거릿 대처 또는 리즈 트러스처럼 공립학교를 나온 옥스퍼드 출신은 해럴드 맥밀런, 캐머런, 존슨처럼 이튼과 옥스퍼드를 나온 정치인과는 차이가 있었다. 맥밀런과 존슨 사이에도 동질성 못지않게 커다란 차이점이 존재한다. 세대마다 사립학교 출신 보수당원들이 있었지만, 매번 형태를 달리했다.
- 어떤 지원자는 이런 질문을 받았다.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소광장이 바클레이 은행 지점과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옥스퍼드 면접은 지식이 없어도 아는 것 이상으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시험했다. 그 시절의 교수들은 가르치는 재미가 있는, 인문학적 소양을 지닌 ‘르네상스 남성Renaissance men’(또는 여성)을 찾고 있었다.
- 고브는 옥스퍼드가 학문적으로 탁월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진정한 엘리트주의가 아니라고 불만을 드러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옥스퍼드가 현재 우리 지도자들의 자녀가 학교를 마치러 가는 곳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 지도자들을 교육하는 곳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 사회도 더 건강해질 것이다.
- 옥스퍼드의 고객층은 확실히 까다롭지 않았다. 1980년대 영국의 대학생들에게 등록금은 무료였고, 그들은 대학에서 실제로 얼마나 배웠는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기득권을 획득했다. 그들은 앞으로의 인생에서 옥스퍼드에 대한 대중의 영원한 경외심으로 기득권을 누릴 것이고, 바닥에서부터 출발할 필요가 없었다.
- 내가 옥스퍼드에서 흡수한 에세이 문체는 신문사의 칼럼니스트로서 경력을 쌓는 데 이상적인 준비 과정이 됐다. 『이코노미스트』를 읽다보면, 주간 기사들 일부가 짧고 도발적인 에세이여서 나만 그런 기사를 쓴 게 아니었음을 알게 됐다. 놀랍게도 내 안에도 옥스퍼드 보수당원 같은 모습이 꽤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나는 얕은 지식으로도 글을 쓰고 이야기하며 밥을 벌어 먹고사는 방법을 옥스퍼드에서 너무 잘 배웠다.
- 1980년대의 많은 교수는 학생이 에세이를 쓰지 않거나 얕은 지식으로 아는 체하는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얕은 지식으로 아는 체하는 것은 직장생활을 하는 데 쓸모가 있었다.
- 만약 어떤 학생이 구조화된 논리로 한 주에 제대로 된 에세이 두 편을 쓸 수 있다면, 주제를 잘 몰라도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어요. 피상적으로 들리겠지만, 의사소통은 인생에서 유용합니다. 때론 간단명료하게 사람들을 확신시킬 필요가 있는데, 특히 정치에 입문하게 될 때죠. 옥스퍼드는 그걸 제공합니다. (…) 옥스퍼드가 추구하는 것은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곳이었다면 제가 왜 이 대학의 교수가 되려 했겠습니까? 만약 교수들에게 물어본다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아니다, 우리의 이상과 책무는 가능한 한 깊이 있는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걸 활용할지는 학생들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 2019년에 어느 교수는 여학생들이나 좋은 배경을 갖지 못한 학생들에게 그들이 옥스퍼드를 다닐 만큼 똑똑하다는 것을 계속해서 재확인시켜줄 필요가 있었다고 말했다. 반면에 그가 ‘제이컵 리스모그 일당’이라고 부른 학생들은 그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똑똑하지 않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확인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 A. N. 윌슨은 그의 저서 『빅토리아 사람들The Victorians』에서 대륙(유럽)에서는 급부상한 중산층이 귀족들을 처형하거나 대체했지만, 영국에서는 ‘신사’ 교육을 받은 중산층 스스로가 상류층의 말투와 사고방식을 익혔다고 했다. 이 시스템은 영국 사회 엘리트의 인재 기반을 확대했고 잠재적 혁명가들을 제거했다.
- 존슨과 같은 기숙학교 출신들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이미 수십 명의 친구를 알고 있었다. 옥스퍼드에 들어오면 이들의 인맥은 자동으로 움직이고, 미처 몰랐던 다른 상류층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이들에게 다른 계급의 학생들은 필요 없다는 의미였는데, 매력적인 여성만큼은 예외였다(옥스퍼드대학 상류사회에서는 항상 여성이 부족했는데, 옥스브리지 과정을 거친 상류층 여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 영국 인구의 극소수만이 그런 곳에 살지만, 에벌린 워에게 브라이즈헤드는 영국의 영혼이었다. 고풍스러운 영국식 건물은 범국가적인 사업의 요체가 되기도 한다.
- 잰 모리스는 옥스퍼드가 ‘폭격을 받거나 불에 탄 적이 없다’고 언급했다.31 그대로 보존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영국의 권력자들은 그들의 모교에 대한 심정적 애착이 있었다. 1956년 크라이스트처치칼리지의 뒷동산을 통과하는 오래 묵힌 도로 건설 계획이 보수당 내각에 전달되었다. 피터 스노는 이렇게 썼다. ‘수에즈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내각은 도로 건설 계획안을 논의할 시간을 냈고, 예상대로(내각 장관 가운데 다섯 명이 크라이스트처치 출신이었다) 그 계획안은 연기되었다.’32 도로는 건설되지 않았다. 현재 크라이스트처치는 잘 보전된 고풍스러운 영국의 완벽한 표본으로 남았고 영화 「해리포터」의 배경으로도 활용되었다.
- 무한함에는 지적으로 긍정적인 면이 있다. 옥스퍼드에서 현재는 지난 천년의 과거를 감출 수 없는, 덧없는 순간으로 느껴진다. 그런 자세는 현실의 걱정이나 유행에서 그저 삶을 관조할 뿐이다. 존 스튜어트 밀에 관한 수업은 전적으로 밀에 관한 것이지, 대처에 관한 논쟁이 아니었다.
- 사립학교 출신들은 상당히 특이한 출발점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잉글랜드 중심, 웨스트민스터 중심의 전공은 그들에게 친밀감을 주었다. 이것은 단순히 잉글랜드의 역사가 아니었다. 지배계급의 역사였고 따라서 그들 가문의 역사였다.
- 소년들은 위인보다는 위대한 상류층의 역사관에 빠져들었다. 똑똑한 영국의 백인 사립학교 출신 소수가 지루한 현실의 걸림돌을 극복하고 더는 경영할 수 없을 때까지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이 그들의 역사관이었다.
- 제국의 역사 또한 상류층에게는 친숙했다. 결국 사립학교와 옥스브리지는, 가톨릭 사제이자 작가인 로널드 녹스의 표현처럼, ‘여기에서 놀이를 마치고…… 착한 소년처럼 밖으로 나가서 제국을 통치하는’ 남자들을 교육해왔다.
- 존슨은 벌링던 클럽보다 더 중요한 무대에서 정치 경력을 쌓아야 한다고 느꼈다. 바로 옥스퍼드 유니언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정치인이 되는 방법을 배우는 곳은 아마 지구상에 없을 것이다.” 잰 모리스는 예리하게 지적했다.
- ‘유니언 경력’은 웨스트민스터(의회)로 가기 위한 좋은 훈련이 되었다. 겉으로는 아군인데 내 바로 앞에서 거짓말한다거나, 내가 그에게 거짓말을 해야 할 때를 알게 되었는데 규정을 어겨도 안전한지, 지키는 것이 나은지도 배웠다.
- 존슨은 이렇게 덧붙였다. “꼭두각시의 비극은 (…) 그가 후보자와의 관계가 특별하다고 과신하는 나머지 진실에 눈을 감는 것이다. 후보자의 충격적인 수법은 자기기만에 빠진 꼭두각시를 가지고 노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