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차에 올라, 노선을 다 외우면서도 지하철 노선도가 보이는 좌석에 앉았다. 그가 한 번이라도 내려보지 않은 역은 없었다. 이렇게 거대한 도시 지하에, 수없이 긴 급경사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와야 하는 깊은 지하 곳곳에 터널이 있고, 수백 대의 기차가 흐릿한 불빛을 비추며 검댕이 묻은 그 터널들을 달린다는 사실에 그는 늘 감탄했다.

  • 느릿하게 떨어지는 맑은 물방울 소리 같은 신호음이 들린 후에는 ‘센트럴 라인: 본드 스트리트 2분 연착’과 같은 문자가 보였다. 아무리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레이랜드는 어디서나 연락이 닿는 걸 증오하면서도 항상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녔다. 신호음이 들리면 전화기를 꺼내 무표정한 얼굴로 소리 내어 읽었다. ‘서클 라인: 빅토리아 역 3분 연착.’

  • 그러면서 지난번과 지지난번에 이곳을 방문하던 때를 추억했고,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렸다. ‘내 인생의 시간으로 뭘 했지?’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이었다. (…) 모든 거리와 장소, 중요한 사건도 전부 기억할 수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이 완벽한 현실은 아니라는 불안감은 여전했다. 만사가 자기와 상관없이 지나쳐간다는 느낌.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할까? 반대로 트리에스테에서 길을 걸을 때면 런던에서 지낸 지난날이 점점 더 현실성을 잃는 듯했다. 그런 순간이면 전화기에서 울리는 런던 지하철의 밝은 신호음은 빛바랜 먼 추억이나 환각 또는 순수한 상상 속 일화 같았다. (…) 이번에 레이랜드는 자동판매기에서 초콜릿을 사지 않았다. 이번은 달라야 했다. 자기 인생의 시간에 대한 질문을 새로 던져야 했다. 새로운 방식으로 시간을 마주하려고 이곳에 왔으니까.

  • 이제 다시 미래가 생겼으니 시간을 낭비하며 지낼 작정이었다. 무엇도 하지 않고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느끼고 싶었다. 숨도 못 쉬며 종말을 향하는 게 아니라는 것, 뭔가 미루어도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다는 걸 느껴보고 싶었다.

  • “몰타? 얼마 전까지 우리 영토라서 그곳에선 누구나 영어를 하잖아. 그런데 왜 몰타어를 배워?” 레이랜드는 그냥 할 줄 알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냥 ‘할 줄 알고’ 싶다고. “그냥 그 이유에서?” “그냥 그 이유에서.” “알았다.” 테일러는 이렇게 대답하고서 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나중에도 이따금 이런 말을 했다. “사르데냐어라고? 거기서는 누구나 이탈리아어를 알아들어.” 레이랜드는 그 언어의 울림을 듣고 싶다고, 단어의 울림뿐 아니라 사람들의 목소리를, 그들 삶의 울림을 듣고 싶다고 대답했다.

  • 이제까지 중요한 것은 언어였다. 모든 것은 이름이 불리고 이야기된 후에야 실제로 존재했다. 레이랜드가 찾아 나선 게 아니라 그게 그에게 와서 부딪쳤다. 처음부터 그랬다. 언어 없이 사물에 도달하기를, 사물과 사람과 감정과 꿈에 닿기를 원할 때도 자주 있었지만 언제나 그 사이에 언어가 다시 끼어들었다. 언어로 이해해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할 때면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곤 했다.

  • 귀를 기울이던 레이랜드는 시간이 좀 흐른 뒤에 자신이 뉴스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에 관심을 쏟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게 정말 내 언어일까? 다른 언어를 이걸로 번역하는 바로 그 언어? 언어는 그저 상투어나 빈껍데기 같았다. 편집국에서 미리 상의하여 온순하게 만들어서 온갖 규칙에 모두 순응했고, 그 결과 감각과 유머와 색깔을 잃어 생기 없는 살균 상태였다. 게다가 언제나 똑같은 표현, 늘 같은 상투어였다. 레이랜드는 워런 숀의 협탁에서 책을 가지고 와서 텔레비전 소리를 끄고 읽기 시작했다. 이 얼마나 큰 차이인가!

  • 올바른 단어들이 꿈같은 확신을 품고 다가왔다. 올바르다는 것은 서로 상대를 향해 느끼는 감정에 어울리는 단어라는 뜻이었다.

  •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기 이야기를 할 때 원래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그대로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스스로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고 해도, 자기 말이 타인에게 끼칠 영향을 고려하거나 이 말 때문에 자신이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기 때문이지. 나중에는 자신의 명료함에서 한 걸음 나아가는 게 아니라 이 말이 타인에게 끼친 영향 때문에 번민해야 한단다.

  • 사람들은 아마 아무 거리낌 없이 자기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다고 기대하겠지.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면 스스로를 향해, 스스로를 위해 완전히 열려 있어야 해. 그런데 왜 자신에게 마음을 열기 위해서도 노력이 필요할까?

  • 번역자의 독자성은 여러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점에 있고 이런 선택은 또한 패턴으로도 존재하는데, 이걸 번역자의 필체라고도 부를 수 있다. 그래서 번역자는 자기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로 말한다고 믿을지도 모르지만, 이는 번역하기의 고유한 방식일 뿐이다. 그런데 똑같은 텍스트를 옮긴 다른 번역자들과 내 언어가 다르다는 점에서, 이건 사실 나 자신의 언어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말한다’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러므로 이 텍스트는 내 것이 아니면서도 내 것이다.

  • 단어는 어떤 일에서 경악을 덜어주기도 하는데, 그럴 때 그걸 발음하는 건 해방이야. 하지만 경악을 더욱 크게 만들기도 하지. 그럴 때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아. 가끔은 이 두 경우를 혼동하기도 해.

  • “말의 아름다움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잊게 했다.”

  • 시드니 요세José, 그의 아들이. 아들은 이름 때문에 학교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던지! 아들은 언젠가 이름이 같은 유명 배우가 ‘예Jé’라고 서명한다는 말을 책에서 읽고 그때부터 자기도 그렇게 서명했다. 철자 두 개로 줄어든 약칭은 명성과 관련이 있었다. 누구나 그 사람을 안다고,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고,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 잘못이라는 뜻이었다.“우리는 미래가 창창했고, 아빠가 더는 경험하지 못할 일을 생각하며 살 수 있었어요.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아빠의 기대수명 너머에 있는 일을 목표로 뭔가를 하면 그 일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감췄지요. 아빠의 죽음 이후를 계획하는 게 마치 배신이나 잔인한 일이라는 듯이 말이에요. 아빠가 더는 경험하지 않게 될 일에 대해 기뻐하는 게 가장 어려웠어요.

  • 낯선 시대와 지역에 관한 책을 무더기로 사들여 책이 바닥에 쌓였고, 하루도 빠짐없이 집배원이 책 소포를 배달했다. 이 모든 것을 여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다가오는 삶의 붕괴를 맹목적인 힘과 열정으로 막으려는 절망에서 탄생한 폭력적인 의지였다. 음험하고 무성한 종양의 증식에 대응하려는 의지와 인식의 필사적인 싸움이자, 파괴되는 뇌세포의 탈선에 대항하여 단단하게 움켜쥔 주먹이었다. 책 주문은 모두 새로운 반란이었고 모든 반란은 삶과 지식, 특히 지식에 태만했다는 자각의 표현이었다. “왜 이 모든 걸 더 일찍 읽지 않았을까. 왜 이 행성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지?”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 그의 절망적인 질문에는 당연히 답이 없었다. 질문이 아닌 비명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난 이제 더는 모르겠다. 너희도 모르고 나 자신도 모르겠어!” 그는 창피했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종말에 직면한 사람은 타인이 그동안 그에 대해 그려왔던 초상을 배려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자신의 생각이 아무리 위험하고 타인을 힘들게 할지라도 그 생각의 표류에 몸을 맡기고 바깥으로 표현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 아마 단계적인 상실이 될 거라고 상상하고 있어. 발작이 일어나는 동안 불가능했던 건 생각이 아니라 말하기였어. 오지 않은 건 생각이 아니라 언어였지. 나는 들리는 말을 이해했고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었어. 평소와 다름없이 생각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서 한없이 마음이 놓였지. 생각은 내적인 말하기일까? 명확한 생각이나 자기 자신과의 논쟁에서 우리는 누군가 듣고 있다면 말할 법한 고요한 단어를 속으로 인식하는 건가?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따금 생각의 형성이란 뭔가 말하려는 준비 자세 이상은 아닌 것 같아. 이런 생각의 형성이 언어의 형성과 비교될 수는 없지만 말이야. 소피아 집의 침대에 누워 나는 속으로 말할 수 있었고, 내가 어떤 언어로 생각하는지도 알았어. 그게 영어인지 이탈리아어인지. 생각은 피해를 입지 않았어. 지워지지도, 느려지지도 않았지. 아마도 정신의 언어는 온전했다고 말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뭔가 말하려는 준비 자세라는 의미에서의 생각도 끊임없이 만들어졌어. 그러는 동안 이런 의미에서든 저런 의미에서든 생각은 바깥으로 향하는 길을 그저 훼손된 형태로만 찾을 수 있었지. 유창하고 자명한 형태로 표현하는 데 필요한 언어는 나에게서 미끄러져 사라졌으니까.

    (…)

    언젠가는 단어뿐 아니라 생각도 미끄러져 나가겠지. 내면에서도 언어가 편하게 나오지 않거나 전혀 나오지 않을 거야. 그런 상황은 내면이 잘게 부서지고, 쇠퇴하고, 스스로를 잃는다는 느낌과 함께 올 테지.

  • 살아오는 내내 삶이 드디어 시작되기를 기다려왔다는 기분이 들어. 마치 내가 온전히 산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런데 뭘 기다렸던 걸까? 시작하는 삶이란, 내가 살아 있으며 그걸로 충분하다고 주저 없이 말할 만한 현재란 뭘까? 알 수 없어. 뭘 기다리는지 몰랐다는 것뿐 아니라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현재가 뭔지 모른다는 사실에 나는 충격을 받았어. 특이하고 혼란스러운 무지야.

  • 내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 뭔지 알아? 시간이 지나기를 초조하게 또는 불안하게 기다리는 거야. 시간을 그저 ‘내 뒤로’ 보내는 것. 이따금 우리는 삶의 어떤 부분이 이미 지나갔기를 바라기도 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온 힘을 다해 원하지. 이 부분을 제거하거나 건너뛰기를 원해. 완전히 정신 나간 바람 아닌가? 하지만 이걸 목표로 하는 감정도 있어. 예를 들면 그리움이야. 우리가 누군가를 또는 어떤 일을 애타게 기다릴 때, 지금과 그것이 나타날 때까지의 사이에 놓인 시간과 나날은 견뎌내야 할 방해물에 불과해. 시간을 계산하고, 엑스 표시를 하며 지워나가지. 말로만 표현할 때보다 훨씬 안 좋아. 시간만 스쳐 보내려는 게 아니라, 이 기간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모든 경험도 삭제하려고 하지. 그게 중요하지 않으리라는 건 처음부터 확실하니까 말이야. 이걸 가장 잘 표현하는 건 목표가 아직 멀리 있는, 증오하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잠이나 알코올로 도피할 때야.

  • 그럼에도 겪어야 하는 모든 일은 원치 않아도 겪게 돼. 해야 할 일과 해야 할 대화에 제대로 참가하지 않고 내면의 시선을 돌린 채 모든 걸 귀찮은 안개처럼 그저 지나가게 두지. 갈망하던 일이 찾아오면 경험할 것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거야. 그때까지는 경험을 내다버릴 수도 없으면서 숨을 참으며 삶을 중단해. 먼 목표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경험을 과소평가하는 건 정신 나간 짓이 아닐까? 오래 기다리다 보면 복잡하고 소름 끼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 부정당한 경험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어.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바뀔 거야. 그건 내 경험이고, 영향력을 끼치지 않는 경험이란 없으니까. 목표지점에 도착한 나는 다른 사람을 포옹하며 감옥 문을 나서겠지. 그때의 나는 기다리기 시작한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야. 원하지 않은 경험의 온갖 파도가 그 사이에 있고, 이 경험의 폭풍 속에는 그때까지의 나를 이루는 존재의 방파제를 강력하게 부딪쳐 무너뜨린 파도도 있으니까. 이제 기다리며 갈망하던 목표에서 벗어났고, 나는 이중으로 배신당한 사람이 되어버렸어. 현재를 탐탁지 않게 경험하며 제대로 겪지 못했지. 그건 갈망하는 목표를 향한 기대의 그늘에 가려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구원받은 순간의 현재를 경험하며 즐길 수도 없어. 나는 이제 갈망이 시작되고 닻을 내린 시점의 나와 동일한 사람이 아니니까. 정말 정신 나간 일 아니야?